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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레이스 생각

한없는 사랑을 주셨던 큰엄마를 기리며

by 쿠레이스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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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새벽, 큰엄마가 돌아가셨다. 향년 68세.
말기암으로 항암치료를 하시던 중 서울대병원에서 효과가 없다며 치료를 중단하자고 한지 두 달쯤 지난 후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큰엄마는 명절이면 나에게 항상 용돈으로 30만 원씩, 50만 원씩 주시곤 했다.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그 덕에 나는 항상 반에서 가장 세뱃돈을 많이 받은 아이 중 하나였다. 그렇게 학생 때 받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고, 이는 내 여행하는 삶의 시작이 된 튀르키예 여행의 밑천이 되었다. 나는 항상 다짐했다. 얼른 커서, 그리고 성공해서 큰엄마께 보은 하리라고. 나이가 들어서는 우스갯소리와 허세를 곁들여 종종 몇 년만 기다리시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살아계실 적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보내드리게 되다니 너무나도 죄송스럽고 가슴이 미어진다.
 
 
약사셨던 큰엄마는 내가 장기로 해외를 나갈 때면 약을 한보따리씩 싸주셨다. 의료 사정이 여의치 않은 해외에서 혹여나 내가 아플까 걱정을 하셨던 것이다. 약봉투에 일일이 네임펜으로 ① 혹은 ②라고 적어 복약지도를 해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자주 아팠어도 오래 아프지는 않았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주변 사람들이 아플 때 약을 나눠주며 세미 복약지도를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제쯤부터인가는 큰엄마가 주시는 약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큰엄마가 주신 약봉투에는 복약지도뿐 아니라 사랑도 적혀있음을, 철이 없어 몰랐다.
 
 
큰엄마와 우리 엄마는 손윗동서와 손아랫동서의 관계로 두 분은 사이가 아주 좋으셨고 왕래도 잦으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명절에 두 분이 커피를 마시며 즐기는 수다타임은 내가 엄마를 내어주고 공부를 하거나 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며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이었다. 나중에 머리가 크고 난 후에는 수다타임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죽이 잘 맞는 두 분 사이에는 낄 수가 없었다. 큰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엄마와의 통화에서 나에 대해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잘 키웠다. 다 컸다. 잘 컸다."였다고 한다. 나에 대해 걱정을 하실 줄 알았는데, 편안한 마음을 가진 상태로 보내드린 것 같아 위안이 된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큰엄마를 뵙고 왔다. 편찮으신 모습을 뵙고도 무엇이 다가오는지를 실감하지 못했다. 항상 건강한 모습만을 뵈었기 때문이다. 입관식 때 마지막 모습을 뵈었지만 생전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큰댁에 가면 큰엄마가 계실 것만 같다. 큰엄마의 말투, 웃음소리, 표정, 행동 하나하나가 다 생생하다.
 
 
나는 장례식 때 소리내어 울지 못했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한 번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람이 많은 지하철 안에서 흐느껴 울고 말았다. 집에 돌아 와서는 소리내어 울었다. 금방이라도 뵐 수 있을 것 같은데... 믿어지지가 않는다.
 
 
우리 친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장수하셨던 나의 친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얼른 하나님 곁으로 가고싶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친척오빠는 큰엄마의 항암치료가 중단되었을 때 나에게 "우리 엄마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천국 갈 것을 믿는다"고 얘기했다. 나는 큰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에 당장 일상으로 복귀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큰엄마는 분명 당신이 믿던 주의 품에 계실 것을 믿는다. 행복하고 편안하게. 그래서 나도 힘을 잃지 않으려 한다. 큰엄마도 하늘에서 그걸 원하고 계실 거라 믿기에. 일상으로 돌아가 큰엄마를 기리며 더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은혜롭고 사랑이 가득하신 큰엄마, 하나님 품에서 편안히 그리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감사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2022년 11월 5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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